[현장에서] 형식 파괴 선언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기업문화 혁신에 박차
[현장에서] 형식 파괴 선언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기업문화 혁신에 박차
  • 이찬우 선임기자
  • 승인 2019.03.25 10:25
  • 최종수정 2019.03.25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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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기질 아버지와 달리 수평적 카리스마 추구
보고, 회의 관행 바꾸고 기존 연공서열식 직제 개편 추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인포스탁데일리=이찬우 선임기자] 몇해 전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그룹 내 고려대학교 출신 임원 몇몇과 식사 모임을 가졌다. 고려대 출신 정 수석부회장이 동문들과 만나 그룹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됐다. 대부분 참석자들은 정 수석부회장 보다 고려대 선배였다.

술잔이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정 수석부회장이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해서였는지 한 참석자가 넘지 않아야 될 선을 넘는다. 이 참석자는 정 수석부회장을 있는 그대로 ‘편한 동문 후배’로 여기고 그만 반말을 하는 실수를 해버렸다.

참석자 모두 아연실색했다. 현대차그룹에서 오너와 직원의 관계를 감안했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실언 당사자에게 인사 조치가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예측은 빗나갔다. 당사자인 이모 이사는 이후 상무를 거쳐 전무로 승진하는 등 현재까지 승승장구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은 최근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 5단계인 일반직 직급을 1~2개로 간소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사원·대리는 ‘책임’이나 '주니어'로, 과장·차장·부장은 ‘수석’ 또는 '시니어'로 통합하는 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3월 중 직원 의견을 수렴해 이르면 연내 도입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연구소 부문에서는 수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를 전 사업장으로 확대하려는 시도이다. 연공서열 중심 직급 체계에 변화를 줘 기업 내부 자극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정의선 깃발’을 앞세운 현대차 그룹이 달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던 기업문화에 메스가 가해지고 있다. 변신의 선두에는 정 수석부회장이 서있다. 자동차 시장의 패러다임은 단순 이동수단에서 ‘움직이는 첨단 하이테크 컴퓨터’로 바뀌고 있다. 기업문화가 바뀌지 않고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다는 정 부회장의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대차그룹 내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예상됐던 일이라는 평가이다. 정 수석부회장이 지난 1999년 입사 이후 아버지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아오면서 그동안 여러모로 다른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이 측근을 거느리기 좋아하는 보스 기질이 다분했다면 정 수석부회장은 수평적 카리스마를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정 수석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현대차 그룹의 기업문화 쇄신 작업은 속도를 내고 있다. 우선 임원회의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몽구 회장 시절 임원회의는 보고 및 정보 공유 위주로 진행됐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안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회의로 바꿔나가고 있다.

전무 이상 임원인 실장·본부장에게만 대면 보고 받던 관행도 없앴다고 한다. 필요한 경우 직급에 관계없이 실무자를 불러 직접 설명을 듣고 있다고 전해졌다. 단순히 보고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금증이나 해결책에 대해 실무자의 의견을 직접 듣고 결론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의사 결정이 빨라질 수 밖에 없다. 최근 인도 최대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올라에 대한 3억달러(약 3,400억원) 투자나 가동율 저하로 어려움에 처한 베이징 현대차 1공장 폐쇄 결단도 정 수석부회장의 빠른 의사결정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일종의 형식주의 파괴는 보고나 회의체 운영 뿐 아니라 복장에도 도입되고 있다.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본사에서는 이달 들어 자율 복장 근무가 실시되고 있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자율복장은 다른 대기업들이 수년 전 시행하고 있는 일이지만 현대차에서 도입하는 것을 보니 정 수석부회장이 전면에 나선 뒤 진짜 달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주도하는 변화는 직원들에게도 서서히 녹아들고 있다. 현대차 본사 팀장급 이상 직원을 상대로 월 1회 열리는 ‘리더스 모닝 포럼’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주요 사업본부별로 돌아가면서 주관하는 이 포럼은 매회 2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다과를 나누며 주요 정책 방향을 공유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형식이 자발적 참여로 이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체질 변화 노력이 이제부터 더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 22일 열린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주총에서 정 수석부회장이 각각 대표이사로 선임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정 수석부회장이 점차 자신감이 붙은데다 명실공히 ‘그룹 총수’로 등극한 모양새이다. 아버지 정몽구 회장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말 그룹 최고 경영진 인사에서 아버지의 오랜 측근인 김용환 현대차 부회장 등을 그룹 계열사로 이동시켰다. 당시 파격적인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완전 아웃’이라는 현업의 기대에는 못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 수석부회장은 정회장의 퇴직한 가신들 의견을 수렴하는 등 고심 끝에 계열사 이동이라는 일종의 타협적 인사안을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현대차 등 주력기업의 대표이사로 올라선 이상 경영진 인사와 기업문화 개선 작업 등에서 보다 속도를 끌어올린 것이란 예측이다.

대부분 현대차그룹 직원들은 정 수석부회장이 주도하는 변화를 반기고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변화만 해도 정몽구 회장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상품개발, 디자인 등 분야에서 외국인 중역의 과감한 발탁이나 일련의 소통방식 변화만해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정 수석부회장이 요구하는 자발적 변화에 직원들이 따라가는 데 오히려 힘에 부칠 지경”이라면서도 “급변하는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 수석부회장이 추구하는 체질 개선이 선결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찬우 선임기자 kmcir@infostoc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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